기독교자료

[열방우체국-캄보디아 김현태 선교사] (5) 선교지에서 적응하기

열려라 에바다 2013. 4. 22. 08:09

[열방우체국-캄보디아 김현태 선교사] (5) 선교지에서 적응하기

 

 

언어·가족 건강 문제로 고통… 부임 첫해 10년치 부부싸움

근래에 프놈펜을 방문하시는 한국 분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와! 차가 정말 많네요. 그런데 거의 모든 차가 렉서스네요” “음… 생각보다 잘사는 것 같네요. 그럭저럭 살만 한가 봐요” 등등 입니다. 캄보디아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차들도 많아지고, 상점의 물건들도 다양해지고, 개발 붐에 따라 곳곳에 새 건물이 많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만 보면 1인당 국민 소득이 미화 2000달러가 넘는 다고 합니다. 전체 캄보디아 국민 소득도 2014년 이면 1000달러를 넘어서서 최빈국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1000달러가 넘었지만, 최빈국에 주어지는 무상 원조 때문에 발표 시기를 조절한다고도 합니다. 어떤 평가이든지 캄보디아가 경제적으로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의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캄보디아의 시골마을 주민들은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가정이 많은 것이 이곳의 현실입니다. 그만큼 빈부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전에 선교사의 조기 철수 원인 가운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가족의 건강이나 자녀 교육 등 가족과 관련된 문제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도 선교사 훈련을 받았던 훈련원의 모토가 ‘Survive and Impact(생존 그리고 영향력)’이었습니다. 또 가정의 선교지 정착을 최우선에 두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편에는 저희 가정의 캄보디아 정착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처음 프놈펜에 왔을 때 우리 가정은 며칠간 우리를 도와주시던 선교사님의 사역지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때는 어려움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집을 구해 우리 가족만 살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일단 현지어를 못하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전구를 하나 사는 사소한 일도 크나큰 긴장으로 다가와 스트레스가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인내심을 갉아먹어 화도 잘 내고 쉽게 흥분을 하는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화가 아이들이나 아내에게 표출돼 아이들이 상처받고, 부부는 싸움이 잦아지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언어 공부를 하는 첫 1년 동안 10년치 부부싸움을 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제일 반겼습니다. 10월에 도착해 한달반 정도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학교에서 1학기 학비를 다 내라고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이들을 집에서 가르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 학기가 되어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니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입학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비가 저렴한 기독 국제 학교들이 있는데, 수업이 모두 영어로 진행되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니 입학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학교를 안 간다는 사실을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요,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요. 학교 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들으면 ‘부모가 괜히 아이들 고생시키는 구나’ 하는 마음에 후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찾아가서 “한국 아이들은 학교가 아니면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다. 그러니 영어를 못한다고 학교에 입학 허가를 안 주는 것은 모순이다. 집에 있는다고 우리 아이가 영어를 익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무작정 졸라 대었습니다. 다행히 6개월을 기다려 입학허가가 났습니다. 입학이 결정되고 기뻐하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습니다.

한번은 한밤중에 둘째인 상규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호흡 곤란을 호소했습니다. 저녁에 감기 기운이 있어서 ‘기침을 좀 하는 구나’ 했는데 밤중에 크룹(기관지 입구가 갑작스런 부종으로 호흡 곤란이 발생 하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 그나마 제가 응급조치로 가습기를 틀어 아이를 진정시키고, 잠시 지켜보니 호흡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마침 그때에 코이카 협력의사로 나온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있어서, 한밤중에 그분에게 도움을 청해 아이의 상태가 호전됐습니다. 이때 제게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아이에게 큰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머물러야 하나요?”라며 힘없이 여쭙던 밤이었습니다.

캄보디아는 개인 모토(오토바이)가 가장 보편적인 이동 수단입니다. 모토 중에는 택시처럼 사람을 뒤에 태워서 다니는 모토 택시가 있는데 보통은 타기 전에 가격을 흥정하며 탑니다. 하지만 외국인이 타면 모토 택시 기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흥정한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요구하는 돈이 큰 돈은 아닙니다. 기껏해야 한화로 250원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주다가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루는 모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던 도중에 또다시 흥정한 가격보다 더 요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 모토에서 내려버렸습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냥 걸었습니다. 그런데 뙤약볕 아래서 10분 정도 걸었더니 집에 도착해서는 그만 탈진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자고 말았습니다. 그날 아내가 제게 “그냥 250원 더 주고 타고 오지, 괜히 오기 부리다가 몸 상하겠다…”며 불쌍한 눈으로 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쥐가 많습니다. 온 가족이 쥐를 무서워해 쥐가 나오면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 납니다. 하루는 쥐를 잡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쥐약을 놓으려니 당시 집에 기르던 개가 걱정이 되고, 쥐덫을 놓으려니 상처 난 쥐를 다루기가 꺼려져서 ‘끈끈이’를 놓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쥐가 눈앞에서 끈끈이를 밟는 것을 보았는데 쥐가 몸부림을 치더니 ‘끈끈이’를 달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저를 비웃듯이 유유히 달아나는 쥐를 보며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장 나가서 쥐덫 사오세요.”

캄보디아는 결혼식이나 생일잔치를 하게 되면 길 위에 텐트를 치고 무대와 하객이 앉는 자리를 만듭니다. 좁은 길을 텐트로 막고 잔치를 하면 때때로 모든 차와 사람이 돌아서 가야 하는 불편함을 겪습니다. 그리고 밴드가 와서 밤 12시까지 앰프 소리를 크게 틀고 노래하며 놉니다. 하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길은 돌아서 가고, 밤늦게까지 노래 부르고 놀아도 그냥 지나갑니다. 추측건대 자기도 잔치를 하면 그렇게 하니, 서로 서로 이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외국인인 저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참고 지냅니다. 하루는 가까이 지내는 동료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이 돌잔치를 해야 하는 아이가 있어 제가 “우리도 텐트를 치고 잔치를 하자. 우리 집 앞 골목을 막고 텐트 치고 밴드를 불러서 밤새 놀자. 그동안 우리가 당한 것을 멋지게 복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동석했던 다른 선교사들이 “그거 좋은 생각이다. 우리 집 앞에서 하자 내가 비용은 다 내겠다. 나도 길 막고 잔치하며 복수하게 해다오”라며 맞장구를 친 적도 있습니다.

온 가족이 태어나 처음 와보는 선교지에서 적응하는 일은 이렇듯 쉽지만은 않습니다. 환경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니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이곳이 내 나라라고 생각하고 섬기며 살다 보면 잊지 못할 유쾌한 경험들도 하게 됩니다. 함께 웃고, 또 싸우며 살아가는 이곳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찾는 것이 선교사와 선교사 가정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현태 (CCC 의대 담당 간사·헤브론 선교 병원 외과 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