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소유냐 존재냐

열려라 에바다 2013. 5. 8. 08:13

[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소유냐 존재냐


‘약속과 성취’라는 구도는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틀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하는 입장에서 구약을 해석했다. ‘약속과 성취’가 무언가를 이루어야 했던 산업주의시대의 과제에 부응했다면 ‘소유를 떠나 존재하라’는 명제는 산업화의 후유증을 앓는 오늘날의 세대를 위한 메시지다. 소유를 벗어나 참존재가 돼야 한다는 명제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였던 조상 땅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미지의 땅으로 떠난다(창 12:1). 소유를 포기한 아브라함의 모험, 그의 결단은 소유를 안전핀으로 여기는 우리에겐 생경하다. 사막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조상 땅을 떠난 사건을 소유를 초월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는 복음으로 해석했던 것이다(마 19:21).

탈소유는 강요된 운명, 하늘의 섭리

탈(脫)소유의 서사시는 출애굽 이야기로 이어진다. 풍요의 땅 나일 강 삼각주를 벗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의 땅 사막을 향해 나아간다(출 16:3). 이집트에서 갖고 나온 금붙이와 보석이 죽음의 땅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출 12:35∼36).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사막에서 소유란 널려있는 모래알 같은 것, 그러기에 탈소유는 강요된 운명이자 하늘의 섭리였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 16:17∼18).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만나, 더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고, 더 가지려는 의지가 무의미한 사막은 하나님만 바라보던 두 번째 에덴이었다. 사막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두 번째 에덴을 동경했다. 그들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불을 스스로 꺼버리고 소유의 가능성조차 자발적으로 차단하면서 그리스도의 연인으로 남고자 사막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안식일 규정은 탈소유적 서사시의 본론이다. “당신들이 엿새 동안은 그것을 거둘 것이나, 이렛날은 안식일이니 그날에는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 것입니다”(출 16:26). 안식일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라 만나조차 거둘 수 없는 절대적 반(反)소유의 날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나르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자기 집 정원에 있는 것은 정원 안 여기저기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깃털만큼 가벼운 것이라도 다른 자의 땅으로 옮기는 것은 금지됐다. 사유재산의 개념 자체를 허용치 않는 안식일, 그 안식일에 대해 프롬은 이렇게 쓴다. “안식일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그냥 지금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욕망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탈소유의 서사시는 실패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지만 그 땅에서 그저 사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지도자를 소유하고자 했고(삼상 8:5), 군대를 갖고 부를 쌓아 지키고자 했다. 약속의 땅을 움켜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움켜쥔 자신들의 손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소유하고픈 자신들의 욕망을 더욱 자극하고 부추겼다. 전능한 하나님은 소유욕으로 불타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셨을까, 아니면 그들의 욕구를 징벌하셨을까. 전능한 하나님? 그렇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지만 전능한 하나님은 동시에 나약한 하나님이다. 우주를 창조하고 역사를 이끄는 절대적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버리면 여지없이 ‘버림당하는’(삼상 8:7) 한없이 약한 분이 하나님이기도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더 정확히 하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냥 내버려두셨다. 이후 역사는 불행하다. 선지자들이 제 아무리 외쳐도 소유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은 욕망을 포기할 줄 몰랐다(사 10:2, 암 8:6). 결국 사람들의 왕국은 멸망했고 그 왕국과 함께 그들의 욕망도 실패했다. 그러기에 구약은 실패의 이야기다. 하나님을 버리고 소유를 숭배했던 한 민족이 과거에 실패한 이야기이자 하나님을 버리고 소유를 숭배하고 있는 민족이 앞으로 실패할 것을 예언하는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프롬의 관점에서 구약을 보니 니트리아 기독교인들의 일화가 더욱 새롭다. 한 수도자가 금화 100닢을 남겨둔 채 죽었다.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형제들이 토론을 벌였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교회에 헌금해야 한다, 망자의 부모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제안이 이어졌다. 하지만 덕망 높은 자의 결정은 의외였다.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행 8:20)라는 성경 말씀이 기준이 됐다. 이 말씀을 근본으로 삼아 원로들은 그 돈을 주인과 함께 땅에 묻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두려움이 사막을 엄습했다고 한다. 예수의 말씀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