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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희망지기-임흥세]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축구공 아이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패스”

열려라 에바다 2013. 5. 8. 08:16

[이 땅의 희망지기-임흥세]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축구공 아이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패스”

 

 

南수단공화국 ‘축구선교사’ 임흥세

“2013년 3월 6일. 밤낮을 가리지 않는 요로 결석 통증 때문에 8월까지 톤즈에서 사역하는 건 힘들 것 같다. 남수단 수도인 주바의 병원에도 가보았으니 치료가 쉽지 않아 결국 한국행을 결심했다. 7일 출국. 10일 한국에 도착. 12일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에 입원. 25일 위암 발견.”

남수단공화국 임흥세(58) 축구 선교사의 일기는 여기서 멈췄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6년간 축구선교를 마무리하고 더 깊은 오지로 떠난 그는 지난해 10월 24일부터 남수단에서의 사역을 꼼꼼히 기록했다. 훗날 복음이 들어간 남수단의 톤즈가 어떻게 변했는지, 세상에 기적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 한 일이다. 그런데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써온 일기를 몸이 아프면서 중단했다.

섬세한 하나님의 터치

올 초 임 선교사는 톤즈를 방문한 단기선교팀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중 비탈길에서 자동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외상이 없어 병원에 가지 않았는데, 2∼3일 지나자 몸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 알이 안 들으면 두 알, 세 알까지 먹었지만 좀처럼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배부터 등까지 ‘붙이는 파스’로 ‘도배’를 하고 또 며칠을 견뎠다.

게다가 요로 결석까지. 그는 버틸 힘을 잃고 말았다. 한국에 온 그는 바로 입원했다. 그동안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상한 치아와 눈, 말라리아 치료도 겸했다. 위와 대장 내시경 검사도 받았다.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느 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소문난 수원병원의 내과 안주희 선생이 퇴근도 안하고 그의 병실을 방문했다. 그리곤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선교사님,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 밤 생명을 거둬 가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지난달 25일 오전, 안 선생이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비로소 알았다. 위에서 암이 발견된 것이다. 임 선교사는 아주대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 날짜도 바로 잡혔다.

의료진은 위를 65% 절개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 날짜는 26일. 그런데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렸다. 개복 수술을 하지 않고 내시경으로 암을 제거한 것. “톤즈에서 말라리아에 걸렸고 교통사고까지 났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깨닫지 못하자 하나님은 요로 결석을 통해 몸에 암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그렇게 만져주셨습니다.”

축구선수가 아닌 선교사로

임 선교사는 원래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된 권투선수였다. 40대에 홀로 된 어머니가 전도사를 하며 어렵게 5남매를 키우는 게 못내 가슴이 아팠던 그는 권투로 세계챔피언이 돼 효도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퉁퉁 부은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초등학생 아들을 붙잡고 어머니는 그만두라고 호소했다. 결국 어머니의 뜻대로 권투를 접었다. 막상 권투를 그만두니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을 못 잡았다. 그때 축구부에서 선수 제의를 받았고 그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지금의 키는 중학생 때 키다. 165㎝의 단신. 빠른 발을 가진 미드필더였다. 하지만 그는 축구선수보다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인천체대를 졸업한 뒤 중·고교에서 명 조련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때 키운 제자가 김주성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이사, 하석주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다. 특히 홍 이사는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임 선교사를 꼽을 정도다.

모태신앙이었던 임 선교사는 지도자 생활과 함께 1980년부터 스포츠용품회사를 운영하며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대량 주문된 유니폼이 반품되면 그는 특히 좋아했다. “남들은 반품이 들어오면 울상을 짓는데 저는 얼마나 좋던지요. 그것을 모았다가 선교사님들에게 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보내는 선교’를 하면서 후엔 제가 직접 선교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지요.”

그 결심을 구체화한 건 81년 결혼하면서다. 예물 등 혼수비용을 선교헌금으로 드린 뒤 아내에게 “축구감독으로 은퇴하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5년의 지도자 생활을 마친 뒤 2007년 4월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등으로부터 남아공 축구선교사로 파송받았다.



남아공에서 ‘희망의 별’을 쏘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다.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뒷골목에서 만난 청소년들. 두세 명이 모여 마약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옆의 또 다른 아이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특히 문란한 성 생활은 임 선교사를 더 아프게 했다. “과연 이들에게 이 공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첫 선교의 대상은 12세 미만의 어린이였다. 무엇보다 꿈과 희망을 전하는 게 급선무였다. 초등학교에서 축구교실을 연다고 하자 맨발로 모인 어린이들이 700여명에 달했다. 임 선교사가 두 발로 축구공을 ‘톡톡’ 건드리자 아이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제가 영어를 잘해서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에겐 ‘굿모닝’ ‘굿애프터눈’ ‘하와유’ 같은 인사 다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두 팔을 하트 모양으로 그리면서 ‘예수사랑’이라고 말한 뒤 ‘지저스 러브 유’라면서 꼭 안아주면 됩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같이 땀 흘리고 축구하면 그보다 더 확실한 선교는 없습니다.”

그는 축구공으로 사도행전 29장의 선교역사를 다시 써내려간다며 축구선교단체 ‘풋볼엑츠29’(FA29)를 설립했다. 그리고 에이즈·교도소(소년원)·고아원 축구팀을 만들어 선수를 키워나갔다. 그에게 축구를 배운 12세 미만 어린이만 2만여명. 프리토리아시장컵 축구대회를 3년간 개최했고 2010년엔 12세 미만 남아공 미션월드컵도 열었다. 선수들을 선발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도 참가했다. 프리토리아시 외곽의 빈민촌 ‘이퀘지레템바’(우리 말로 ‘희망의 별’)를 거점으로 숨 가쁜 사역을 펼쳤다.

“소년원에서 처음 아이들의 벗은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온몸이 칼자국이었고 마치 철사로 꿰맨 듯 보였습니다. 찡그린 얼굴로 저를 쏘아보는데 주저주저하다 ‘예수사랑’ ‘지저스 러브’라고 말한 뒤 축구공을 운동장 한가운데에 놓았지요. 소년들이 축구를 하기 위해 달려오는데 점점 표정이 밝아지더라고요.”

소년원에서 만난 한 소년은 이렇게 털어놨다. “저는 무슬림이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과 축구를 통해 사랑이 뭔지 알게 됐어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임 선교사는 8개 교도소 청소년들을 위한 ‘교도소 리그’를 만들었다. 특히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가출한 한 소년을 ‘아들’로 삼아 함께 에이즈어린이축구팀도 이끌었다. 어린 남녀학생들에겐 축구를 가르치면서 올바른 성 교육도 시켰다.

그의 헌신에 남아공 정부가 감동했고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감사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프리토리아시는 흑인 거주지역 중 가장 큰 쇼샹구베에 8만여㎡의 학교 부지와 교사(校舍)를 축구선교센터로 쓰라고 내놓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마친 뒤 한국 대표팀 허정무 감독은 선수들이 사용하고 남은 물품을 FA29에 기증했다. 의약품은 에이즈병원에 전달했고 일부는 아프리카 전역에 예수사랑과 한국인의 마음을 알리는 데 사용했다.



축구공 하나 들고 더 깊은 오지로

2012년 11월 16일 임 선교사의 일기 중 한 대목이다. “선교사는 빈 가방을 들고 떠나는 데 익숙해야 한다. 빈 가방을 들고 떠나야 하나님께서 그 이상으로 채워주신다. 선교사는 내려놓는 데 선수가 돼야 한다.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데는 프로가 돼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는 빈 가방을 챙겨 길을 나섰다.

“맨발로 축구하고 물로 허기를 채웠던 남아공 아이들이 지금은 나이키 축구화를 신고 공을 찹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론 흐뭇했지만 ‘떠날 때가 됐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더 어렵고 힘든 오지로 보내 달라고 기도드렸지요.” 지난해 10월 영화 ‘울지마 톤즈’의 배경이 된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 ‘희망고 빌리지’를 세웠다.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와 복합교육문화센터를 조성하고 특히 축구를 통해 새 희망을 불어넣겠다며 매일 새벽 ‘땅 밟기 기도’를 드리고 있다.

톤즈는 모든 게 시작이었다. 개신교 선교사의 사역, 축구, 하다못해 청소까지. 축구 시합을 위해 공터에 모인 첫날. 남수단축구협회 관계자, 어린이와 부모 등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운동장에 흩어져 있는 병이나 깡통조각부터 주웠다. 멀뚱멀뚱 그의 행동을 쳐다보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사용할 이 운동장을 우리 손으로 깨끗이 하자. 그리고 우리 집, 우리 마을도 우리 손으로 청소하자”고 외쳤다.

지금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축구하기 전 운동장부터 정리한다. 그리고 임 선교사를 보면 자연스레 ‘지저스 러브’라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톤즈에서의 축구선교. 지금까지 20여 축구팀이 만들어졌고 600여명의 선수들이 뛰고 있다.

이 모든 게 발끝에서 움직이는 공 하나로 시작됐다. 축구공으로 22명의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 그렇게 복음이 들어가면 아이들에겐 꿈이 생기고, 이를 위해 자연스레 마약과 술, 담배를 끊는다. “성령의 축구공을 아이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패스했더니 그 성령의 공이 국경과 인종, 언어의 장벽을 넘어 장차 아프리카 56개국으로 뻗어갈 것입니다.”



일기로 본 톤즈 사역은 현재진행형

임 선교사의 일기장엔 또 축구사역과 함께 일상이 소개돼 있다. “먹을 게 없어 도마뱀을 구워 먹었다거나 특식이라고 나온 닭다리는 뼈밖에 씹히지 않았다, 물에는 각종 오물과 기름이 둥둥 떠 있고, 늘 모기와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작은 일에 감격해하는 그의 일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주바에서 그렇게 먹고 싶었던 시원한 콜라를 마셨다. 톤즈에서는 먹지 못한 음료. 시원하니 감사하다.”(12월 22일)

“스태프들과 모터 펌프를 열심히 고쳤다. 2시간여 노력 끝에 물이 나오는 게 아닌가. 마치 사역의 절반은 해결된 것 같다. 채소가 물을 많이 먹고 잘 자라기를. 오늘은 물 냄새를 맡으니 기분이 좋다.”(2013년 1월 21일)

위험천만한 상황도 전했다. “어제 저녁 빌리지 앞에서 소 때문에 전쟁이 났고 7명이 죽었다. 아마 오늘도 보복 전쟁이 있을 거라는데. 아프리카는 국가적 전쟁도 많지만 내전과 부족, 특히 건기 때 유목민들이 소를 먹일 풀을 찾아 움직이다 이렇게 전쟁을 치른다고 한다.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12월 1일)

임 선교사는 위암 수술 후 체중이 7㎏ 빠졌다. 현재 죽과 과일, 채소 등을 섭취하며 조금씩 체력을 키우고 있다. “사역하면서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번에 쉼의 기회를 주시네요. 아프리카 전역에 뿌린 2000개의 축구교육용 CD를 좀 더 보완하고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축구공을 모으며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주바를 중심으로 펼쳐질 축구선교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