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공 전법
제목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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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火藥)이 발명되기 이전의 화공법(火功法)은 가공할 전략이었다. 우리 나라 전사( 戰史)에도 화공의 역사는 유구하다. `당서(唐書)' 열전(列傳)에 보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 유인원(劉仁願)은 백제의 원군(援軍)으로 백강(白江)에 포진한 일본 수 군선(水軍船) 4백 척을 화승(火繩)으로 연결, 화공으로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했다. 가연성(可燃性) 물질을 닭이나 들짐승에 장치하여 불을 붙인 다음 배 위에 던져 놓음으로써 점화시켰다는 전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황해도 연안대첩(延安大捷)의 화공법은 유명하다. 왜장(倭將) 구로다 나 가마사의 3천 병력에 연안성이 포위되자 부사(府使) 이정암은 군민(軍民) 5백 명으로 성을 지키는데, 섬 둘레에 빈 집을 골라 짚과 풀섶과 생솔가지를 산더미처럼 군데군데 쌓아놓고 풍향(風向)에 맞는 섶에 불을 질러 연기로 3천 적군을 마비시키고, 그 틈에 기습을 감행하는 화공법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적병 중 사상자가 절반이 넘자, 시 체들을 모아 불사른 다음 포위를 풀고 철수했던 것이다. 한말 평양 대동강에 배를 대고 무력으로 통상을 강요하던 제너럴 셔먼 호(號)도 화공 법으로 소각시키고 있다. 평안감사 박규수(朴珪壽)는 썰물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이 셔먼 호를 향하여 수십 척의 불을 지른 신탄선(薪炭船)을 방류, 화공법으로 셔먼 호를 화염에 싸이게 했다. 이미 고려시대에 석유에 의한 불도랑(화공방위선)이 구축돼 있었다면 곧이 듣기지 않 을 것이다. 송(宋)나라의 강여지(康與之)가 쓴 `작몽록(作夢錄)'이라는 문헌에 한국 땅에 석유가 나 그로써 변방(邊方)에 불도랑을 파, 방어했다는 견문이 적혀 있다. 맹화유(猛火油) 로 표현된 이 석유는 고려 동쪽 천리에서 난다 하고 한여름 볕을 쬐면 바위에서 절로 기름이 흘러나오는데 이를 유리그릇에 담아 날라다가 토갱(土坑)을 파 이를 태워 외침 을 막는다 했다. 중국 `무비지(武備志)'에 거란(契丹)이 송나라에 바치는 공물 가운데 변경을 지키는 맹화유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 이 화공이 뜬소문만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페르시아 만의 다국적군은 함포 사격의 엄호 아래 쿠웨이트 해안에의 상륙작전을 시도 하리라 하고, 이라크측에서는 이 작전에 대비, 대량의 석유를 불도랑에 유출, 불을 지 르는 화공법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이렇게 불도랑으로 상륙작전을 지연시 킬 뿐 아니라, 연기가 충천 -, 지공(地空)의 모든 전자장치를 마비시키는 2중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막대한 석유 낭비가 몰아올 전세계의 심리적 공황(恐慌)까지 유발하는 3중효과 까지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자(孫子)가 화공편(火功篇)에서 말했듯이 풍향 을 좌우하는 성수(星宿:天文)를 한 치 차도 없이 잘 잡지 않으면 화공으로 오히려 화 침(火侵)을 당하는 법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