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역경의 열매] 김철륜 <1> ‘멜빵에 나비넥타이 맨 멋쟁이’ 칭찬에 가린 장애 고통

열려라 에바다 2017. 9. 21. 08:11

[역경의 열매] 김철륜 <1> ‘멜빵에 나비넥타이 맨 멋쟁이’ 칭찬에 가린 장애 고통

다섯 살 때 소아마비 여동생도 장애… 아버지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송

 

[역경의 열매] 김철륜 <1> ‘멜빵에 나비넥타이 맨 멋쟁이’ 칭찬에 가린 장애 고통 기사의 사진
2014년 11월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제26회 아리 평화의 콘서트’에서 지휘하고 있는 필자.

하나님은 이른 비를, 때로는 늦은 비를 내려주신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내 삶은 고비마다 ‘늦은 비’를 맞은 인생이었다.

초등학교 땐 몸이 아파 1년 정도 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도 중도에 그만뒀다가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은 연탄 배달을 하다가 뒤늦게 입학했고, 해외 유학은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떠났으니 남들보다 한참 뒤처졌다. 박사학위는 20년 만에 받았다. 지도 교수가 생존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들보다 늘 한걸음 늦은 지각 인생인 셈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뤄진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6·25전쟁 통에 태어난 나는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척추가 휘어지고 왼쪽 다리는 신경이 마비되어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설상가상 턱밑 임파선이 부어오르면서 곪아 터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피란 중이라 의사도, 약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오직 ‘내 아들은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칼을 불에 달궈 목에 가득 차 있던 고름을 빼냈다. 그때 생긴 흉터가 아직 남아 있다.

소아마비와 목에 난 흉터는 내 패션을 바꿔놓았다. 꼭 ‘가분수’ 같은 몸매이기에 항상 멜빵을 하고 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바지가 흘러내린다. 또 목에 난 흉터를 감추느라 와이셔츠 깃을 세워 놓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멜빵에 나비넥타이는 칠순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이 순간도 ‘김철륜’의 트레이드마크로 통한다.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멋쟁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이런 사연이 있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했다. 냇가에 다리가 없어 징검다리를 건너다녔는데, 부모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경북 울진으로 이사해서는 우리 가족에 더 큰 고난이 닥쳤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우체국장 집의 높은 툇마루에서 놀다가 거꾸로 떨어져 그만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척추장애인이 된 여동생은 더 크지 못했다. 얼굴도 기형으로 변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교회를 오가며 이런 찬송을 나지막하게 부르신 기억이 난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찬송가 272장)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마음을 이해한다. 아버지 멍에는 다름 아닌 나와 내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장애를 지닌 아들딸 앞에서 대놓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그 찬송 속에 아버지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장애로 무척이나 움츠려 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체육시간이었다. 60m 달리기를 하는데, 나는 늘 그렇듯이 아이들 옷가지를 지키며 운동장 한쪽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철륜이 너도 나와.” 뛰어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출발선으로 나오라는 선생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버텼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오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시더니 출발선에 턱하고 세워놓으셨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약력=△1951년 강원도 양양 출생 △연세대 교회음악과,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 신학과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철학박사 △안양대 부총장 △노엘찬양단 지도목사 △예안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