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54:1)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2024. 3. 3. 15:53

54편 1절.

 

54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유대의 남부지방에 있는 광야를 ‘십광야’라고 하고, 또한 그곳의 조그마한 고을의 이름을 ‘십’이라고 한다. 사울 왕이 에돔사람 도엑을 시켜서 놉에 사는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을 다 죽였을 때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을 갔다. 도엑이 제사장 가족들을 다 죽일 때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용케 피하여 이 다윗에게 합류를 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을 다니는 중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타작마당을 탈취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다윗과 같이 있던 600가량의 사람들을 이끌고 싸우러 나갔다. 이 때 다윗에게 직접 싸우러 나가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6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가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그일라 지방의 사람들을 구원했다.

 

다윗이 그일라 지방에 있을 때 사울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오자 다윗이 이것을 알고 근처의 황무지 요새로, 또는 산골짜기로 피해 다녔다. 십 수풀에 숨어있던 어느 날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와서 다윗을 위로하고 자기 집으로 갔는데, 십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기브아에 있는 사울 왕에게 다윗이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있다고 고해바쳤다.

 

그래서 산 하나를 두고 다윗이 산 이편으로 피하면 사울 왕이 그리로 쫓아오고, 다윗이 이것을 알고 산 저 편으로 피하면 사울 왕이 그리로 쫓아오고 했다. 하나는 안 집히려고 이리 저리 피하고, 하나는 잡으려고 이리 저리 쫓아다니고 하며 서로 뺑뺑이를 돌고 있었다.

 

사울 왕은 큰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와 합세한 자들이 방방곳곳에 숨어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다니면서 이방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면 그들과 싸웠고, 사울 왕을 자기 원수로 생각하여 싸우려고 하지 않고 피해 다녔다. 다윗은 이런 와중에도 자기와의 싸움을 잘 싸웠고, 또한 상대와의 싸움에서 자기의 마음이 누구 편에 서 있는가를 항상 심사하며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운 거다. 우리도 신앙싸움을 할 때 자기 감정, 자기 꾀에서 나온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과 정반대 편에 서서 싸우지 말고 ‘내 마음이 어디로 돌아가나?’ 하는 것을 잘 살피면서 하나님 쪽에 붙어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볼 때 다윗이 사울 왕에게 잡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뜻이겠느냐, 붙잡히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뜻이겠느냐? 우리가 사울 왕과 다윗을 볼 때 비록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지만 다윗의 신앙이 누구를 붙들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이걸 보지 못해서 사울 왕 쪽을 택한다. 사울 왕에게는 단체, 조직, 부귀, 명예영광이 다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 사울 왕이 누구와 합세가 되어 있느냐?’ 이게 문제다. 사울이 누구와 합세가 되어 있느냐? 도엑과 합세가 되어있다. 이걸 잘 봐라.

 

다윗이 사울 왕에게 안 잡히고 안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마찬가지로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진리신앙은 이방 세상사상과 합세된 혼합적인 신앙사상에 잡히지 않아야 하고, 이방 세상사상의 정신이 진리신앙에게 잡혀 죽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가 사울 왕의 조직에 잡히면 신앙생명이 죽는다. 다윗이 사울 왕으로 인해 겪는 사건을 확대 또는 축소시켜 보면 우리의 신앙상태를 말해주는 거다. 이와 같은 신앙사상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가는 거다.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으면서도 사울 왕의 정신에 물들지 않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다윗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독했을까? 이럴 때는 ‘오직 주만 바라보고 기도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도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끔찍이 사랑하고 계시고, 또 다윗을 통하여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고자 지금 역사를 하고 계시는 중이다. 다윗을 사울 왕으로 인해 겪는 고통 가운데서 구별하고 분별하여 악에게 넘어지지 않고, 유혹 미혹을 당하지 않고, 거기에서 시련 연단을 받은 후에 왕으로 세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있는 거다. 그러나 다윗은 그 당시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거다.

 

오늘날 자기도 ‘하나님께서 무슨 뜻으로 나에게 이런 역사를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일상생활을 속에 다 들어있다. 즉 나의 일생생활은 전부가 나의 신앙 믿음을 돈독하게 하는 훈련이요 연단이다. 자기가 이 사실을 알고 산다면 현재 자기의 생활이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께 대해 원망이 나오겠느냐, 감사가 나오겠느냐? 감사가 나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사람을 깨닫게 하십니까? 이런 지도자를 통해서 사람을 깨닫게 하십니까? 이런 부귀 명예 영광의 사건을 가지고 와서 나의 정신과 마음과 신앙사상을 연단시키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다.

 

성도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버리실까? 이스라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성도 다윗은 이스라엘의 공로자다. 다윗이 원수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찔렀다. 이처럼 싸움에 능수능란한 다윗이 우리 마음 같다면 당장 사울을 찾아가서 해치우고 말 수도 있겠지만 다윗은 그렇지를 않았다.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나님께 꼭 물어보고 행동을 하는 다윗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물어본다는 게 성문계시가 기록되기 전에는 그런 사건이 있었지만 오늘날도 무엇을 하던 일일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해야 하느냐? 매사를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면 대답을 하실까? 대답을 하신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느냐? 지금은 성문계시가 완성이 되었다. 그래서 문제는 자기가 성경을 안 보고 못 깨닫는 게 문제고, 교회 인도자가 안 가르쳐 줘서 문제지 자기가 물어보려는 것에 대한 답이 성경 안에 다 들어있다.

 

성도 개인마다 각 사람이 처한 사건과 환경이 다르다. 그러면 다르다고 해서 각자의 신앙정신이 다른 거냐? 모든 성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다 같다. 그러면 사람마다 각자 다른 상황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이 뭐냐? ‘나처럼 온잔자가 되라’ 이게 들어있다. 하나님 당신처럼 인격의 온전, 성품의 온전. 이 온전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 신적 가치판단 평가성이 다 들어있다.

 

우리 성도는 ‘나에게 닥친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고,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게 첫째 문제다.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면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겪던 신앙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되지를 못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당장 치지를 않는다. 이 기다림 속에는 ‘네가 그러냐? 네가 그 성질로 나갔지?’ 라고 하시면서 더 큰일을 주셔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질대로 그 일을 하려다가 더 큰 손해를 보게 해서 깨닫게 해 주시려는 뜻이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겪는 것은 인간 자기가 어리석어서 자기에게 고통을 불러오는 거다. 다른 게 없다. 자기가 자기를 못 다스리니 얼마나 고통인가? 자기가 자기를 못 다스리니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도 못 받고, 사람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사랑도 못 받는 거다. 이러면 고독하고 외로워진다. 이런 이유는 모른 채 남 원망을 해 봐라. 누가 고통이겠느냐?

 

성경에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가 다 들어있다. 그래서 지금은 매사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으려고 물어볼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러면 우리가 뭘 요구해야 하느냐? 지혜를 달라고 하라.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바로 할 수 있을 런지 지혜를 구하라.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옆에서 도우심이 있다. 이건 없이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도와달라고만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느냐? 우리의 신앙 믿음은 말씀을 깨달으면서 이 말씀을 잡고 모든 크고 작은 상황이나 사건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덧입어 가는 거다.

 

거장 골리앗을 죽인 다윗인데 이 다윗이 사울 하나를 못 죽이겠느냐? 그럼에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며 고난을 당하면서도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다. 원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산 거다. 그리고 사울 왕이 무고한 자기를 죽이면 사울 왕의 죄가 많아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커지기 때문에 사울로 하여금 이런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사울 왕을 피해 다닌 거다.

 

그러면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신데도 왜 끝까지 피해 다니지 않고 잡혀서 죽은 걸까? 누가 잡아 죽였느냐? 예수님을 누가 잡아 죽였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제자가, 사도가. 우리들에게 뭘 가르쳐 주려고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온 거냐?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잡혀 죽었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잡혀 죽었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잡혀 죽었다. 그런 것처럼 믿는 자기가 예수를 안 팔아먹으면 예수님은 안 팔린다. 안 믿는 사람이 ‘예수야, 돈 줄께 나에게 팔려오너라’ 이런 건 절대로 없다. 이런 신앙의 이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로 통해 팔리는 장면이 나온 거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신앙의 이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교인이 예수님을 팔아먹는다. 교회가 예수를 이방세상에 넘겨준다. 오늘날 신앙의 사고방식을 봐라. 그렇지 않느냐?

 

사울이 선한 다윗을 죽이면 사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십 사람들이 다윗의 신앙을 안다면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다는 것을 사울 왕에게 가서 고해바치겠느냐? 우리는 이 사건에서 성분적인 면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다윗은 진리사상으로, 성령의 감화성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살았고, 반면에 사울 왕은 세상사상과 정신, 육의 사상,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악령의 감화로 살았다. 둘 다 이스라엘 사람인데,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두 사람이 각자 어떤 주격적 사상으로 사는지가 보인다.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십 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이 말을 했다. 다윗이 자기들의 관할 안으로 숨어들었다는 거다. 이들은 타락된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조직화 되고 단체화 된 사람들이요 그 사상들이다. 그런데 다윗은 진리진실을 가지고 이들의 관할 속에 비밀히 숨어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들 속에 숨어있는 것이 그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이냐? 그건 아니다. 따라서 십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기들 속에 들어온 진리성도 다윗의 정신을 배우고, 다윗을 살리고, 다윗을 높인다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다윗을 죽이도록 사울 왕에게 고해바쳤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인명과 재산을 해치는 원수대적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우리 모두 속으면 안 된다. 아무리 진리를 받아도 사람을 해코자 하고, 재산을 해코자 한다면 이건 마귀 짓이다. 믿는 우리는 사람을 주님과 밀착시키는 일을 하고 재산을 사망적인 일을 하는 데 쓰지 않게 해야 한다. 이러려면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한다. 이게 옳은 일이다. 아무리 조직이 크고, 단체가 크고, 부자가 됐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복 복’ 한다면 이건 복음이 아니다. 일반인들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는 거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사상 자체가, 가지는 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안 믿는 사람과는 다른 거고, 이방신을 믿는 종교인들과도 근본적으로 거다.

 

십 사람들은 다윗이 자기들 속에 들어왔으면 다윗을 살리고 다윗의 정신 사상을 받아야 했듯이 성도는 자기에게 진리진실이 왔으면 영접하고 사랑하며 살려야 한다. 여리고 성에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누가 살렸느냐? 기생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렸다. 참 잘 한 거다. 그 결과로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얻었다. 이걸 계시 신앙적으로 보면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온 사람을 죽이게 되면 자기의 구원은 없다.

 

여리고 성의 기생라합은 이스라엘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가지고 있는 정탐꾼을 죽이지 않았고, 또 죽이라고 두 정탐꾼을 여리고의 군대들에게 내어주지 않고 자기의 목숨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고 그들을 보호해서 살렸다. 이 일로 후에 여리고 성이 일시에 무너지기 직전 라합과 그에 소속이 된 모든 자들이 구원을 얻었다. 이걸 신앙 면으로 우리들에게 말하면 사람이던 이력이던 자기가 살린 것은, 이뤄놓은 모든 것은 다 이룰구원으로 통과다. 기생라합이 진리를 사수하니 구원을 얻은 것처럼 자기 목숨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사수하라. 진리를 내버리면 자기에게 임시적으로 좋은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십 사람들로서는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니 이 사울에게 충성을 해야만 힘없는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그들도 가치판단 평가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진리진실을 가진 다윗을 사울보다 더 크게 볼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이 자기들의 장래가 있는 거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싸운다면 사울 왕을 도와야 할 것이고, 사울 왕과 다윗이 싸운다면 다윗을 도와야 한다. 사람을 보고 편을 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 편에 있느냐?’ 이걸 봐야 한다.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있고 악령에게 붙들린 사울 왕을 도울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성령의 감화를 받고 있는 진리진실한 다윗을 도와야 하는 거다. 이것이 성경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다. 세상 모든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네가 나를 위해주니 좋구나. 너는 내 편이다’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이런 면에서 십 사람들과 사울 왕은 큰 실수를 한 거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구원’이라고 할 때 다양한 면으로 쓴다. 안 믿는 사람들은 병과 질고, 가난, 실패, 홍수, 전쟁, 지진 등등 세상살이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에서 건져주는 구원, 즉 세상살이가 어려운 데서 더 좋게 해 주는 구원을 말한다. 이방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 신을 찾아가서 그런 요청을 한다. 이런 구원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서 구원도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죄에서 구원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물으면 일반적인 죄에서 구원이 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는 선악과 따먹고 지옥에 갔거나 지옥에 가게 생겼는데 예수님을 믿으므로 천국에 가는 구원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기 위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겪을 적마다 고통을 안 당하고 축복으로 잘 살게 해 달라는 구원의 요청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기본구원을 얻은 성도가 크고 작은 사건 환경 가운데서 그것에 빠지지 않고 그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어 나오는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구원을 생각하는데, 그러면 본문에 다윗이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어떤 구원에 관한 기도일까? 가난에서 부자 되게 해 달라는 거냐, 사울 왕에게 붙잡히면 꼼짝없이 죽기 때문에 자기 육신을 살려달라는 기도냐? 우리는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다윗은 육신의 목숨이 죽을 것이 무서워서 도망을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윗의 신앙을 볼 때 어떤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거냐?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가 다윗의 신앙을 가졌다면 어떤 기도를 하겠느냐? 인간들에게는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건데’ 이런 게 있는 거다. 다윗이 어떤 구원에 관한 거냐? 기본구원이냐? 이룰구원, 성화구원에 관한 기도다. 앞에서 여러 면의 구원을 봤는데, 가장 크고 중요한 구원을 말하니까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로 들리는 거지 이룰구원을 이루며 사는 사람은 모든 생활에서 다방면으로 구원을 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알아서 역사를 하신다.

 

우리가 실력만 있으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영능의 능력자로 만들려니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구원의 일을 하신다. 성도를 영능의 실력을 쌓게 하는 이 구원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구원이고 주님에게만 있는 거다. 이 외에 다른 구원은 다 시시한 거다. 즉 구원의 가치를 알아라 그 말이다.

 

진리성도 다윗이 어느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하는 거냐? 누구의 이름이라야 자기가 구원이 될 것 같으냐? 아무 이름이라도 부르면 구원이 되는 거냐? 구원은 어느 이름이라야 만이 되는 거냐? 구원의 성질이 뭐냐? ‘내가 구원을 입었다. 내가 구원을 얻었다. 내가 구원을 이루었다’ 이게 다 뭐냐? 질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의 성품성, 이것만 있다면, 이것만 이뤄놓으면, 이것을 가지기만 하면 그 외에 세상살이를 하는 것은 지혜지식적으로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이것은 놓친 채 부수적인 것만 쫓아간다면 어떻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이 되겠느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공자나 석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이 쫓아와서 구원해 주느냐? 어떤 사람이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떠내려가는데 중이 와서 건져 올렸다면 이게 누가 건져준 거냐? 석가가 중에게 얼른 귀띔을 해서 중이 달려와서 구원해준 거냐? 누가 건졌던 대국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한다면 뭐든지 다 붙잡고 쓰신다.

 

믿는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섭리는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인간이 좋게 해 주면 진리는 멀리하고 그만 그 인간에게 달라붙는 것은 못 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이 더 좋게 해 주면 또 그리로 갈 게 아니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새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하는 기도는 성화구원에 관한 기도이고,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하는 기도는 육신구원에 관한 기도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느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실까? 자기 주관적으로만 살던 자가 어려움에 처해지니까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얼른 구원해 주실까? 이럴 경우 어떻게 보면 지독히 말을 안 듣는 사람을 차마 죽일 수는 없고, 딱 붙잡고 ‘내 말을 들을래, 안 들을래. 말을 안 듣는다고 하면 안 구해준다’ 라고 하실 수도 있는 거다.

 

내가 백 날 부르짖더라도 듣고 응답하실 분은 하나님이다. 문제는 평소에 자기의 중심 사상이 어디로 가서 있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고 하는 게 있는 것이니, 내가 한 마디를 해도 하나님께서 속히 들어주실 수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서 빨리 들어주실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울면 감동이 되는 거냐?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하나님의 일을 걱정을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향하신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성도가 당신처럼 온전자가 되는 거다. 그러니 내가 자타가 하나님의 온전을 입는 면을 염려하고 걱정을 하고 이 일을 하는 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온전을 위해 이런 저런 사건 환경을 다 동원시키시는데 나는 지혜가 없고 미련해서 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온전을 입을 수 있습니까?’ 라는 기도를 한다면 이 기도를 누가 들을까? 마귀가 들을까, 하나님이 들을까? 하나님이 들으신다.

 

이런 기도는 표면적으로 들으면 내가 내 걱정을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내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냐?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당신의 온전을 입으라고 역사를 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마귀 짓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보고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느냐?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이런 걱정을 안다면 뭐라고 기도를 하겠느냐? ‘왜 나를 만들어 내놓고 골치를 썩습니까? 나는 바른 사람이 되기는 글렀으니 그냥 놔두십시오’ 이래야 되겠느냐, 아니면 ‘주님, 옳소이다. 이 못난 나로 인해 하나님께서 마음이 얼마나 아프십니까? 내가 이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으니 지혜를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이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를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이 된 거다. 내가 평소에 누구를 위하여 살다가 환난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거냐? 여기에 따라 자기가 성화구원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