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유럽은 금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황금을 찾으려고 혈안이었으며 네덜란드와 영국은 해적질로 선단을 공격해 큰 이익을 거두었습니다.1)
금에 대한 갈증은 흑사병의 확산과 농업의 발달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쇠 쟁기 등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생산이 급증하자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흑사병의 사망자들이 남긴 재산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였습니다. 돈의 수요 증가가 금을 찾으려는 행렬을 낳았습니다. 인구증가와 가치 교환 수단이자 자본 축적 방편으로 금 수요가 급증해 결국은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2)
1. ‘세기의 결혼’이 에스파냐를 패권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1절에 “그 왕이 많은 외국 여자들과 파라오의 딸을 모아브 여자들 암몬 여자들 시돈 여자들 히타이트 여자들을 사랑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럽 왕국들이 탐험에 나서게 한 추진력의 근원은 국력이었습니다. 에스파냐 지역에 국제정세를 바꾸는 크리스트교 왕국이 등장하였는데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일 왕국입니다.3)
이베리아반도의 세력 구도는 중앙부를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하였으며 동부는 아라곤 왕국, 서부는 포르투갈로 삼분된 상태였습니다. 이사벨은 가장 강력했던 카스티야의 공주였습니다. 이사벨 공주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배우자를 골랐습니다. 그 상대가 바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 왕자였습니다.4)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왕자는 결혼함으로 에스파냐의 성격을 크리스트교 해양 패권 국가로 이끌어나갔습니다.5)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부부는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에 첫째와 둘째가 잇따라 요절하였습니다. 셋째 아이는 후아나 공주인데 필리프 대공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다스리던 카스티야의 후계자로 정하여졌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는 바람둥이였습니다. 그녀는 1504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6)
그녀는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에게 카스티야의 섭정을 맡겼습니다.7)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뿐만이 아니라 카스티야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카를로스(Carlos, 1500~1558)입니다. 이사벨 여왕의 외손자 카를로스는 현대의 네덜란드 지역 안에 자랐고, 외할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고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까지 에스파냐 왕국 깃발이 나부낀 것입니다. 에스파냐의 통일도 카를로스 때에 비로소 완벽하게 이뤄졌습니다.8)
카를로스(Carlos)의 힘은 외조부모에게 받은 영토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임에 카를 5세(Karl V)로 불렸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오스트리아 땅도 물려받았습니다.9)
오스트리아와 아라곤과 카스티야를 모두 받은 카를 5세의 에스파냐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그 자리를 굳혔습니다.10)
최고의 명문가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도 이때 잡혔습니다. 초강대국이 된 에스파냐에는 돈도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신대륙에서 캐고 약탈한 금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11)
에스파냐의 경제는 번영 가도를 달려야 하였으나, 정반대였습니다. 에스파냐의 경제는 속에서 멍들어갔습니다. 신대륙에 에스파냐 식민지를 건설하고 운용하는 비용으로 지출되었고 인디오의 임금으로도 지급되었습니다.12)
모든 것을 참작해도 에스파냐에는 부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을 에스파냐는 흘려보내었습니다. 돈이 빠져나가는 가장 큰 구멍은 과시욕과 전쟁이었습니다. 많은 양의 금은 가뜩이나 호전적인 에스파냐 제국을 대담하게 하였고, 에스파냐는 군사적 정치적인 모험을 마다하지 아니하게 된 것입니다.13)
카를 5세는 넓은 영토에 맞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1519년 죽은 때 그는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노렸습니다.14)
제후들에 대한 득표 경쟁에서 결국 카를 5세가 승리를 거뒀습니다. 승리는 돈으로 따낸 것이었습니다.15)
카를 5세는 당대 최고 금융그룹이었던 ‘푸거 가문(Fugger family)’에서 빌린 거액의 돈으로 뿌린 무제한의 뇌물로 황제가 되기는 하였지만, 후환을 남겼습니다. 프랑수아 1세와의 감정이 틀어져 19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치열했지만 카를 5세는 결국 이겼습니다. 전술적 승리뿐 아니라 금전적 이득도 얻었습니다.16)
카를 5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석방 조건으로 왕자 2명과 금화 200만 크라운의 몸값을 요구하였으며 석방금을 챙긴 카를 5세의 보물창고는 더 늘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몸값의 첫 번째 지급금은 120만 크라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금화를 세는 데만 4개월이 걸릴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17)
카를 5세는 돈방석에 앉았지만 얼마 안 지나 모두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을 막는 것에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합스부르크가는 오스만튀르크의 1차 빈 공격을 간신히 막았습니다. 종교개혁이 막 시작된 직후에 신교도의 부추김과 억압 정치에 반발해 1524년 일어난 독일농민전쟁을 진압하는 것에 또 돈이 들어갔습니다.18)
프랑수아 1세와 클레멘스 7세는 강성하여지는 에스파냐를 견제하려고 공조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카를 5세는 로마 진격과 약탈을 명령하였습니다.19)
1527년 에스파냐군 6,000명과 독일 용병 1만 4,000명, 모두 2만 명의 군인이 로마를 약탈한 ‘로마의 약탈’이 바로 그것입니다. 병사를 지휘한 사령관 부르봉 공 샤를 3세의 전사로 통제가 사라지자 점령군들이 인정사정없이 무자비하게 로마를 짓밟았습니다. 점령군에 의해 민간인 4만 5천 명이 죽거나 집을 잃었습니다.20)
전쟁이라는 것이 민간인들을 보호하려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적국의 민간인을 보호하려고 하면 전쟁에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적국의 민간인들을 보호하려면 무기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미사일을 가지고 있어도 미사일을 적국에다 쏟아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군사시설이라든지 산업기반시설에다가 미사일을 날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 몇 명이 맞아서 죽는 때는 있겠죠. 그러나 민간인을 만 명 또는 수십만 명 이렇게 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푸틴과 러시아에 있어 우크라이나 민간인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민간인 10명 죽었어. 적국 미사일로 인해 민간인 10명 죽었어. 이러면서 여론 조성하고 러시아를 악마화하고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하다 보면 민간인 죽을 수 있는 것이죠. 10명 죽을 수 있는 것이죠. 민간인 10명 죽은 것은 전쟁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이성을 잃고 공격해 버리면 10만 명, 100만 명이 죽는 것입니다. 10명 죽었다고 ‘민간인 죽었네, 어쩌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계엄군을 보냈는데 여자가 군인 총 뺏으려고 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뼛속까지 좌파고, 차은우보다 이재명이 더 잘생겼다고 하는 여자입니다. 자기의 외모 이상형이 이재명이라고 하는 민주당의 “안귀령” 말입니다. 그녀에게 이재명은 군침을 흘릴지라도 차은우는 눈길도 안 줄 것입니다. 이런 페미니스트로 인해 한국 남자가 한국 여자와 결혼하기를 꺼립니다. 민주당이 공중분해 되고 그 우두머리들은 다 사형시켜야 한국이 삽니다.
이 악녀는 이재명의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하며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2020년 제21대 4·15 총선 당시에 도봉갑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며 김재섭 의원에게 패배하였습니다.21)
“강철 부대”를 보면 군인 네 사람이 300㎏ 타이어를 뒤집어 옮깁니다. 300㎏을 4로 나누면 군인 한 명당 75㎏짜리를 옮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수부대 군인은 이런 타이어를 뒤집으며 300m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힘과 전투력을 가진 군인이 여자 한 명에게 총을 뺏길 것입니까? 다치지 못하게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봐주는 것이지, 힘으로 하면 한방에 나가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나가떨어졌다면 ‘계엄군에 의해 민간인이 다쳤네’ 하면서 그것 트집 잡아서 ‘우리 촛불집회 하자’ 그럴 것 아닙니까?
고대 로마로부터 내려져 온 건축물이 파괴되고 고문서와 책자도 탔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도 이때 막을 내렸습니다. 잦은 전쟁에 따른 지출 과다로 병사들에 지급할 보너스 재원이 없었던 카를 5세의 재정이 튼튼했다면 피할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습니다.22)
문명사 가장 큰 오점의 하나로 꼽히는 로마의 약탈(Sacco di Roma)도 카를 5세의 호주머니가 두둑하였다면 발생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3)
‘로마의 약탈’은 역사에 무수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반종교개혁의 공감대가 퍼졌습니다. 루터파 용병들이 로마를 가장 잔인하게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신교에 대한 큰 반감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 탄압을 자행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습니다.24) 루터파 교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용병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합니다.
루터파 용병들이 약탈하니까 개혁 교회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것이죠! 로마의 민간인들이 자기들 군홧발에 짓밟혀야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나 크리스천이야.’라고 말로는 그렇게 하는데, 그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정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살아야죠! 그들이 예수님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로마에서 민간인을 살상하였으므로 이후에 전도의 길이 막히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신교에 대한 반감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기게 된 것이고, 그 결과가 결국은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신교에 대해 탄압하지 않던 나라도 신교를 탄압하게 되니, 종교 탄압으로 인해 신교도들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 프랑스와 피렌체의 메디치가 사이의 결속이 강하여졌습니다. 가장 큰 금융 가문이던 메디치가가 배출한 2명의 프랑스 왕비에 의해,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25)
오늘날 ‘나 교회 다녀’ 그러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하고 똑같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전도에 방해되고, ‘기독교’ 하면 반발심이 생겨납니다.
“기독교” 하면 불신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개독교”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가지고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1) 권홍우, 『부의 역사』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8), 47.
2) 권홍우, 『부의 역사』, 47
3) 권홍우, 『부의 역사』, 48.
4) 권홍우, 『부의 역사』, 48.
5) 권홍우, 『부의 역사』, 49.
6) 권홍우, 『부의 역사』, 52.
7) 권홍우, 『부의 역사』, 52.
8) 권홍우, 『부의 역사』, 52.
9) 권홍우, 『부의 역사』, 54.
10) 권홍우, 『부의 역사』, 56.
11) 권홍우, 『부의 역사』, 56.
12) 권홍우, 『부의 역사』, 58.
13) 권홍우, 『부의 역사』, 58.
14) 권홍우, 『부의 역사』, 58.
15) 권홍우, 『부의 역사』, 60.
16) 권홍우, 『부의 역사』, 60.
17) 권홍우, 『부의 역사』, 60.
18) 권홍우, 『부의 역사』, 60.
19) 권홍우, 『부의 역사』, 62.
20) 권홍우, 『부의 역사』, 62.
21) https://www.chosun.com/national/incident/2024/11/15/6SNKQYDDRFFJHHN4PXAIQZGNXM/
22) 권홍우, 『부의 역사』, 62.
23) 권홍우, 『부의 역사』, 61.
24) 권홍우, 『부의 역사』, 62.
25) 권홍우, 『부의 역사』, 62.
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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