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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교수-양광호 목사 대담 “북한 주민들 구약·신약을 藥으로 잘못 이해”

열려라 에바다 2012. 7. 30. 07:23

김현식 교수-양광호 목사 대담 “북한 주민들 구약·신약을 藥으로 잘못 이해”
 
김현식 조지메이슨대 북한학 연구 교수와 양광호 페어팩스 한인교회 담임 목사의 인터뷰는 지난 28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위치한 김 교수의 평양성경연구소에서 이뤄졌다. 이후 전화 인터뷰가 추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평양어 성경을 발행한 이유에 대해 “쉬운 성경으로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현재 북한에도 성경은 보급돼 있다. 한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1977년 펴낸 공동번역본의 북한판인데, 문장의 어미 부분과 일부 철자법만 평양 표준어로 고쳐져 있다. 또 한국의 공동번역본과 마찬가지로 유일신 개념인 ‘하나님’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표기돼 있어 100% 개신교 성경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현재 60년 넘게 이어진 분단으로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한글성경을 거의 이해하기 힘들게 됐다”면서 “북한 주민들은 ‘성경’을 ‘성(性)에 관한 책’으로, ‘구약’이나 ‘신약’을 약학(藥學)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이 같은 현상은 북한이 1960년대 초에 ‘언어혁명’을 벌여서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외래어 대부분을 순수 국어로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양어 성경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약’은 ‘예수 이전편’, ‘신약’은 ‘예수 이후편’으로, ‘십자가’는 ‘십자가 형틀’, ‘유월절’은 ‘건너뜀 명절’로 용어를 바꿨다. ‘요한복음’도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으로 고쳤다.

특히 요한복음을 가장 먼저 번역한 데 대해 김 교수는 “요한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장 잘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요한복음에 이어 누가복음을 평양말로 번역 중이며, 향후 5∼6년 내에 신·구약 번역을 모두 마친다는 계획이다.

김 교수가 평양어 성경을 내기까지는 준비 기간만 5년이 걸렸다. 실제 번역은 하루에 12∼14시간씩 매달려 꼬박 3개월이 소요됐다. 번역본은 영어성경 The NET Bible(2011년판)을 사용했다. 번역 과정에서는 KJV, NIV, NLT 등 다양한 버전의 영어성경과 일본어 및 러시아어 성경, 헬라어본 성경 내용과도 대조·비교했다. 신학·과학·법학 전문가들과 영어성경교육 전문가들의 조언도 받았다.

그는 “향후 이 성경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 주민들과 전 세계에 흩어진 북한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면서 “남은 나의 인생 소원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써 주셔서 평양어 성경 번역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여든 해 인생은 마치 롤러코스터 같은 삶이었다.

그는 북한의 교수양성기관인 평양사범대(현 김형직 사범대)에서 1950년대 초부터 38년간 러시아어 교수로 근무했다. 김일성의 눈에 들어 71년부터 20년 가까이 김일성 처가쪽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활동했다. 59년에는 6개월 동안 김정일의 러시아어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다.

남들은 인생을 정리할 회갑(回甲) 무렵, 김 교수는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운명에 직면했다. 91년, 교환교수로 러시아에 머물던 그는 6·25 전쟁 때 헤어져 미국에 살고 있던 누나를 만났다. 42년 만이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가족 상봉 소식이 북한 정보부서에 알려지고 ‘들어오라’는 소환지시가 떨어졌다. 북으로 돌아가면 기다리는 건 죽음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가 선택한 것이 탈북 망명이었다. 92년 한국에 들어온 김 교수는 10년간 머물다 2003년 도미해 재미 북한학자로 또 한번 변신했다. 지금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부인 김현자(56)씨의 만남도 극적이었다. 탈북 전, 전통한복 디자이너였던 부인 김씨가 남북공동민속축제 참석차 러시아에 머물 때 김 교수가 통역을 맡았다가 사랑이 싹텄다. 올해가 결혼 20년째다.

김 교수의 신앙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그가 15세 때 어머니는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어머니가 유언을 남겼다. “현식아, 주일학교에서 너를 가르치는 최순직 선생처럼 평양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거라.” 고 최순직 목사는 훗날 예장대신 및 백석 교단 설립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 땅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김 교수는 김일성의 유물론에 흠뻑 젖었다. 탈북 후에는 92년 예수 재림 소동을 빚었던 이단 단체인 다미선교회의 재림 교리에 기대를 걸었다가 낙망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물론이 다시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학 강의 도중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때 그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내가 너를 전쟁터에서 살려냈고, 북한에서 러시아 땅으로 끌어냈고, 다시 이곳(한국)으로 인도한 것을 모르느냐.’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한 때는 98년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유언을 남기면서 언급한 그의 주일학교 교사 ‘최순직’ 목사를 충남 천안에서 직접 만난 것. “그때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심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며 ‘그때 그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있다.

페어팩스(미국)=진행 양광호 목사,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