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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애란 (15) 北에도 구조조정 공포… 입사하자마자 돌격대 차출

열려라 에바다 2012. 8. 1. 08:21

[역경의 열매] 이애란 (15) 北에도 구조조정 공포… 입사하자마자 돌격대 차출
 
그럭저럭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됐다. 어머니 친구 소개로 품질감독소에 취직했다. 썩 마음에 드는 직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사 첫날부터 구조조정에 휘말리다보니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직장에서 잘리면 농촌이나 광산, 탄광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요구 같은 것은 내세울 수도 없었다. 회사에서 요구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회사에 취직해 보름도 안 지났는데 돌격대에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입사 동기생들이 6명이나 됐다. 하지만 내가 가장 백그라운드가 약했다. 전화 한 통 해줄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잘못하면 찍히기 때문에 두말없이 돌격대로 떠날 채비를 했다.

사실 다 자란 처녀를 자녀로 둔 부모들은 돌격대에 보내는 것을 싫어했다. 청춘 남녀가 모여 사는 집단인 돌격대엔 남녀 간에 워낙 사건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돌격대는 젊은 남녀가 한 숙소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하루 종일 함께 일하다 보니 불상사가 일어나기 십상이었다.

돌격대 일은 너무 힘들다. 남녀가 합심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남자들은 빨래나 봉제 같은 것이 어렵고 여성들은 나무를 끌거나 힘든 육체노동 때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커플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것을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다 돌격대 유부남들은 몇 개월, 몇 년씩 부인과 떨어져 외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터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런 말이 세간에 돌기도 했다.

“아이, 그 집 딸의 젖이 염소젖이 됐다메.”

여러 돌격대원들이 하도 여자를 희롱의 대상으로 삼아 농락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다 자란 처녀를 둔 부모는 딸을 돌격대에 보내고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돌격대에서 눈이 맞아 유부남과 처녀가 간통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심지어 부인과 이혼하고 다른 처녀와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부남이 처녀에게 임신을 시켜놓고 책임지지 않아 미혼모가 되는 경우도 많은 곳이 돌격대였다.

처녀인 나도 이렇게 험한 이야기가 나도는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일이 힘든 것도 걱정이지만 그보다 더 큰 걱정은 남자들의 횡포에 어떻게 견뎌 낼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북한 여성들은 당에 입당하기 위해 성 상납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돌격대 기간에 입당한 여성들을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23세 처녀가 공장의 초급 당비서로부터 성 상납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올곧게 자란 처녀는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헌데 며칠 후 그 처녀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내부 문건에 정치적 발언을 잘못한 것으로 기록돼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남자들의 욕망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생기면 모든 책임은 여자 몫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꼬리를 치기 때문에 남자들이 따라다닌다’는 것이 북한식 여성관이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당해야 하는 것이 북한 여성들이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짐을 싸 돌격대로 떠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시 사로청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나의 짐을 함께 들고 따라오셨다. 그러면서 내심 걱정이 돼 “야, 자주 편지하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올라오게 할께. 범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가서 행동 잘해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내가 탄 버스는 돌격대가 자리 잡고 있는 후창군으로 향했다. 양강도 혜산 우리 집에서 40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북한은 교통이 나빠 1년에 한 번 다녀가기도 힘든 곳이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