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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애란 (24) 1997년 8월, 드디어 자유 향해 압록강을 넘다

열려라 에바다 2012. 8. 9. 20:57

[역경의 열매] 이애란 (24) 1997년 8월, 드디어 자유 향해 압록강을 넘다
 
1997년 8월의 새벽, 가족과 함께 탈북을 시도했다. 탈북 의사를 비친 아버지와 학철이, 미란이, 나와 내 아들까지 모두 다섯 명이 먼저 강을 건너기로 했다.

남편은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가서 깨워보니 완전히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설사 깨어난다 해도 걸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 냉정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칠흑 같은 새벽이라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당장이라도 누가 뛰쳐나와 내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았다. 저벅저벅…. 발이 어디 놓이는지도 몰랐다. 정말 무서웠다. 평소에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어찌나 빨리 걸었는지 10분 만에 도착했다. 강가로 내려서니 무서움은 극에 달했다. 이 새벽에 국경의 강을 건넌다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떠난 몸이었다. 돌아서서 갈 곳도 없었다. 나도 나지만 남동생 학철이는 너무 무서워 거의 반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압록강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 가로누운 압록강은 거대한 구렁이 몸뚱이 같았다. 검푸르고 번들거리는 물결 위로 중국 장백현 강둑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왔다. 우리는 뒤돌아볼 틈도 없이 일제히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 순간 창공을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서라!” “….”

정신없이 물살을 갈랐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빨랐다. 내 뒷덜미가 이미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너희 도망치는 거지?”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요. 우린 지금 돈을 사기 당해서 돈 받으러 가는 길이에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국경 경비대원들에게 끌려 강가로 나와 정신없이 매 맞기 시작했다. 그중 동생 학철이는 젊은 남자라 더 많이 맞았다. 어둠 속에서도 학철이의 입에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나도 발길에 차였다. 아기와 함께 강가 자갈밭에 넘어졌다.

한참 매를 맞았다. 우리는 모두 강가 자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몸수색이 시작될 것 같았다. 이때 동생 학철이가 내게 신호를 보냈다. 걸리면 함께 죽으려고 시장에서 사온 쥐약을 먹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조금은 더 버텨보고 싶었다. 죽어야겠다는 작정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오히려 살고 싶다는 용기까지 생겼다.

한 명, 한 명 조사를 받고 있는데 강 건너에서 전지불이 비쳤다. 심문하던 경비대원 한 명이 강 건너 전지불에 신호를 보내면서 중국 사람을 만나고 왔다. 그러더니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일행의 엉덩이를 치며 “빨리 건너가라”고 했다. 아버지의 미국 가족들이 미리 건넨 뇌물이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목까지 차오른 압록강을 건넜다. 강폭은 60m 정도였다. 중국 쪽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우리는 장백현의 한 주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고모부와 우리를 남한에 데려갈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모부를 붙잡고 오열했다.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준비된 차로 이동했다. 도로에는 군데군데 한국어와 중국어로 “북조선 사람을 보면 신고하시오. 신고하면 상금 1만5000원을 드립니다”라고 쓴 표지판이 있었다. 북한을 탈출한 첫날밤은 심양에서 보냈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북한에 남겨진 나머지 식구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