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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선희 (2) “조국의 명예를 위해…” 한국 간호사 최고 인기

열려라 에바다 2012. 8. 20. 19:39

[역경의 열매] 김선희 (2) “조국의 명예를 위해…” 한국 간호사 최고 인기
 
서독에 파송되는 간호사 모집 인원은 400명이었다. 그런데 신청자는 4배인 1600명이 몰렸다. 지원자 대부분이 고졸 이상이었고 대학 졸업자도 많았다. 여고 중퇴인 나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몸집도 작아 힘든 일을 할 수 없다고 돌려보낼 것 같았다.

다행히 필기시험은 붙어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왜 서독에 간호사로 가려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감 없이 내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

“부모님이 다 세상을 뜨시고 제가 동생 넷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우리 동생들에게 쌀밥이라도 원 없이 먹여주고 싶고, 공부도 계속 하도록 학비를 벌어야 하니 지원했습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하나님께서 면접관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독일로 가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끼이는 것이라고도 믿고 싶다. 나는 띌 듯이 기뻤다. 1년 가까이 간호사 양성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간호사 면허시험에도 합격했다.

1972년 5월 10일이었다. 나는 눈물짓는 동생들의 환송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떠났다. 둘째에게 열심히 버는 대로 돈을 보낼 테니 남은 동생들 잘 보살피고 공부도 시키라고 신신 당부했다.

알래스카를 거쳐 독일 쾰른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국 간호사들은 각각 배치된 병원으로 흩어졌다. 나 한 사람을 위한 자동차와 간호사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낮은 자존감으로 살아왔기에 이렇게 대우받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더구나 그 간호사는 원래 간호원장이 나와야 하는데 너무 바빠 자신이 대신 나와 미안하다고 했다. 또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차 안에서 먹으라며 빵과 음료를 주었다. 새로운 곳에 와서 어리벙벙해 하는 내게 보여준 그 간호사의 따뜻한 미소와 배려는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때 느낀 고마움은 후일 내가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주었다.

내 숙소는 코리안하우스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었다. 당시 얼마나 한국 여간호사들이 많이 왔는지 한국인을 위한 숙소를 따로 지어 준 것이다. 내 방에 들어가니 책상 위에 예쁜 튤립이 한가득 담긴 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쌀이 큰 그릇에 담겨 있었다. 꽃은 나를 환영한다는 표시이고 쌀은 내가 당장 쌀을 구하지 못할 테니 일단 밥을 해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준 것이다. 고마움에 눈물이 글썽거려졌다.

본격적인 병동 근무가 시작됐다. 독일 여성들이 왜 간호사를 기피하는 줄 알 것 같았다. 덩치가 산만한 환자들은 다리 한쪽 들기에도 엄청 힘이 들었다. 여기에 갖가지 잡무가 더해지면서 저녁이 되면 파김치가 될 정도로 일이 힘들었다. 그래도 우리 간호사들은 조국의 명예를 생각하며 묵묵히 일에 최선을 다했다.

동생들이 잘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주로 편지를 썼지만 못 견디게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5마르크짜리를 넣고 공중전화를 했다. 동전 떨어질 때마다 가슴도 철렁거렸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외롭고 힘들 때면 혼자서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버지가 가톨릭 신자이셔서 이 행동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를 다녀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휴일이 되면 밀린 잠을 싫건 자곤 했다. 당시 병원 근무 계약은 3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고 아니면 재계약을 하거나 병원을 옮겨도 되었다.

한국 간호사의 인기는 최고였다. 일도 잘하고 성실하고 휴가도 잘 안 가고 어려운 일을 자원하니 병원에서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병원마다 한국 간호사 파견 비율이 계속 높아졌다. 나 역시 병원이 재계약을 원했다. 봉급도 올려주겠다고 했다.

어느 날 친구 간호사가 주말을 이용해 다른 병원에서 높은 일당을 받으며 근무를 하고 왔다. 나도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 이틀을 꼬박 새며 근무한 뒤 돌아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현금으로 지급되는 마르크화를 보면 기운이 번쩍 났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