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구원자, 부활하신 예수
사도행전 4:5-12
권호만barnabak추천 1조회 17224.04.19 18:40댓글 2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제자들의 전도활동은 뜨거운 열정으로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경험한 직후 베드로가 했던 설교 내용을 보면, (행2:22-36)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그 놀라운 일에 어떻게 침묵할 수 있었겠습니까?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더욱 담대하게 예수 부활을 증거 하게 됩니다.
이러한 활동에 기름을 붓듯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치유사건이었습니다.(행3장)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울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
그렇게 말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킬 때 앉은뱅이는 일어나 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①여러분, 이 사건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과 능력과 확신을 주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진정 구원의 이름이다.’
예수 이름이 얼마나 능력 있는가를 체험하면서 전도는 더욱 더 힘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②아울러 이 사건은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이 거짓이거나 헛된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시켜주었습니다.
당시에 시중에는 ‘예수 부활은 제자들이 꾸민 사기극이다.’
‘환상을 보고 부활했다고 잘못 말한 것이다.’ 는 등의 여러 가지 잘못된 소문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을 통하여 그 소문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③예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한편 이 사건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던 장본인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하는 제자들이 못마땅하던 차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으니 부인할 수도 없고 예수 부활을 거짓이라고 우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자들을 위협해서 더 이상 예수 부활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심문을 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1.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180도 바꾸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오늘날 국회와 같은 기관으로 당시에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공회가 주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도들을 해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공회에 참석한 면면을 보아도 이들이 얼마나 권세 있는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앞에 세우고 따집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 말이 글로 읽으니까 별것 아닌 것같이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예전에 안기부나 기무사에 끌려가서 그들 앞에서 심문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이해가 더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이 공회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그들과 맞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우리가 앉은뱅이를 고친 것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제자들의 이러한 담대함에 놀란 것은 오히려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부였던 사람들이 아닌가?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말을 하는가?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한 번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가 잡히기가 무섭게 그렇게 빨리 도망갔던 제자들,
어린 계집 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무서워서 집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그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는가?
여러분,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180도로 변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나셔서 자기들에게 분명히 보이신 부활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들은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겁쟁이가 아니라 용감한 자가 되었고 도망자가 아니라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용감하게 예수 부활을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 부활이 결코 거짓이거나 헛된 소문이 아니라 분명한 팩트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기들이 꾸며낸 거짓 이야기라면 자기들의 목숨을 내 놓고 그 거짓된 사실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을 위해 목숨을 바칠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한 번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요 완전한 부활이었음을 분명하게 믿어야 하고 이 믿음의 기초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워가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부활과는 거리가 먼 신앙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살고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느냐에 집중될 때가 많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의 정신이나 개념에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8,90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가 모두 죽습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그런 다음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모든 사람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부활을 통한 영생의 삶에 근거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고 영생의 삶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2. 제자들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친 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 육신의 건강을 얻은 것도 구원이 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구원은 참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인 줄 믿습니다.
그 구원이 영생의 소망을 주기 때문이요 주님과의 삶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 구원에 있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구원에 있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때로 기독교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떻게 자기들의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종교의 다원성에 대하여 등산에 비유하는 말을 합니다.
산 정상은 한 곳이지만 그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개가 있듯이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나 길도 여러 개가 있다는 설명을 합니다.
기독교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이렇게 펼치고 있습니다.
저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생각이고 성경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어떤 오해를 받고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나사렛 예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시기에 구원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러한 일이 없는 존재를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가 영국의 사상가인 칼라일을 만나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입니다.
이 새로운 종교는 완벽하고 분명한 종교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칼라일이 “새로운 종교를 만드신다니 좋은 일입니다만, 그전에 당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겁니다.”했답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단지 머리 좋은 천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졌음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3.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에서도 구원하시고 인간의 모든 환난, 고통가운데서도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성도의 복이며 부활신앙이 주는 축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우리도 다방면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지선 씨가 쓴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마 전 고난주간 금요 철야 예배에서 기도하던 중에 저는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그간의 고통의 시간들이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매일 아침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야 했던 화상 치료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으로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두려움의 시간,
치료 후 다시 진통제를 맞기까지 벌벌 떨면서도 애벌레처럼 기어 다시 침대로 옮겨 가야 했던 때….
더 이상은 나빠질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식했던 인조 피부가 녹았을 때….
제 고통은 끝나지도 않을 것 같아서, 예수님도 나만큼은 안 아팠을 거라고 대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기적을 기대하며 찾았던 일본에서 왜 제겐 기적을 안 보여 주시냐며 소리 내어 엉엉 울던 날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속상해서 세상 무엇보다 초라하고 작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엎드려 나는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더 이상은 이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고 울부짖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예수님이 닦으시고 '내가 다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이 나를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보다 큰 위로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보다 더 큰 보상은 없습니다.
부활보다 더 큰 소망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어떤 인생의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에서 여러분들을 해방시키시고 구원해주실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믿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 병을 고쳤습니다.
이 지선씨는 온몸의 화상이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온갖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의 위로이며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환난과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맛보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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