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요7: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열려라 에바다 2025. 2. 25. 08:32
(요7: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궁극이추천 1조회 4125.02.23 09:02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장 24절: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지난 설교 보충.


우리 주님은 우리를 외모로 판단치 않으신다. 주님이 타락된 세상사람들처럼 외모로 판단을 한다면 우리를 부르지 않는다. 우리보다 훨씬 부자로 살고, 잘 생기고, 세상으로 볼 때 번듯하고, 세상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을 불렀을 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할 때도 남들보다 잘난 게 없다.


주님은 우리를 외모로 보시지 않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학식, 박식, 지식의 소유성, 재물의 소유성, 사회의 지위 등등의 사람의 외모를 보고 이해타산을 따진다. 이방 불신세상 사람들이 살을 빼고, 눈을 찢고, 얼굴을 깎고 하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데서 나오는 거다. 이런 바람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때는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사람이 신앙하는 정신을 보시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세상 쪽으로 취급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로마황제 같은 사람을 부르지 않고 왜 무식한 사람이나 어부나 넉넉하지 못한 사람을 불렀을까?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과, 현재의 우리를 경제적으로 비교하면 제자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서 살았고, 물질을 모을 새도 없이 세금으로 로마에 다 빼앗겼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훨씬 더 잘 산다. 그러나 신앙 면으로 보면 지금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잘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더 잘났다고 생각을 한다면 사람을 외모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면 은혜를 못 받는다.


그러면 사람을 외모로 본다는 게 무슨 뜻이냐? 사람의 껍데기를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자가 자신의 껍데기를 고치고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으면 고친 껍데기의 모양으로 아기가 나올까? 속에 든 생명대로 나온다. 이것은 사람의 속과 껍데기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가견적 현상적이다. 이게 나쁘다기보다 문제는 이런 것을 보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지식이 기준으로 되어 있는 거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진리 따르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데 교회가 안 믿는 사람들처럼 외모 외형 껍데기를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점이다.


안 믿는 사람이 자기의 양심대로 하는 것과,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를 가지고 말씀을 붙잡고 따르는 중심은 질이 다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회개를 해도 가룟유다처럼 일반 양심적, 일반 도덕성적 개념의 회개가 있고, 베드로처럼 말씀을 붙잡고 고치는 회개가 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말씀을 붙잡고 고치는 게 회개다. 말씀을 붙잡고 회개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서 빗나간 것을 말씀대로 고치는 거고, 믿는 사람이 일반 도덕성에서 빗나간 것을 고치는 것은 일종의 반성에 불과한 거다.


믿는 사람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에 맞춰서 옳고 그르다고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틀린 거다. 예수님의 기준은 하늘의 기준이요, 영적 기준이요, 영원히 효력을 볼 수 있는 기준이다. 오늘의 판단이 그 날에 가서도 맞는 판단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기준을 놓고 자기의 언행심사를 여기에 맞춰나가는 게 믿음생활이다.


딤전: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사람들이 이 기준을 넘어뜨릴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계:에서 짐승이 두 증인에게 시기 질투가 나고 미워서 죽인 후에 자신들이 이겼다고 하며 교제의 술잔을 나눴지만 그러나 삼일 반 후에 이 두 증인이 살아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은 예수님을 이길 수 없고, 이길 수 있는 차원도 안 되고, 능력도 안 되고, 지식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인간이 예수님의 육신을 죽인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지는 게 아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은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기신 실력과 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긴 실력과 능력을 증명하는 거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얼마든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거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할 때 기꺼이 바쳤으니 다른 것은 이 순종에 다 들어가는 거다. ‘아들’ 하면 부모로서는 희망, 소망, 행복, 아비의 노후대책 등이 다 들어있는 원료뭉치다. 그럼에도 이런 아들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친 이 믿음의 깊이를 안 믿는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세상의 부모들은 현상세계의 것에 이해타산을 놓고 자식을 교육하다 보니 자식 속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커져서 도둑질이나 사기를 치거나 살인이 일어나는 등등의 온갖 죄를 짓게 되는 거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으로 볼 때 사람이 망한 거다. 우리 교회 부모들은 먼저 부모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그 다음에 아이들 버릇은 집에서 잡아라. 부모는 안 고치고 아이가 교회에 나와서 떠든다고 잡으려고 하면 안 잡힌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키우면서 자식을 위한 기도를 하니 성령님의 역사로 어머니의 소원성이 어머니의 젖줄을 타고 사무엘에게 들어갔다.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판단을 하시듯이, 주님이 판단을 하시듯이, 성령님이 판단을 하시듯이 공의로 판단해야 한다. 공의의 판단은 영원히 하나님의 판단이요, 시대나 환경이나 존재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판단이요, 오늘의 판단이 천국에 가서도 효력이 있는 판단이다. 이게 자기의 능력이다. 이 세상에서 이런 판단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능력자다. 권세자다. 힘이 있다.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진리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판단이 빠르다. 마귀가 함부로 못 달라붙는다.


외형 외모 모양 형태 형식 배경을 힘을 삼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른다. 오늘 밤도 모르고, 내일도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사람을 이때까지 살려두시는 거냐? 믿는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보고 네 실력을 닦으라는 거다.


고전:에서 우리의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사람이 사람 외에 여러 가지 짐승으로도 부활을 한다는 거냐?


이런 것을 들고 우리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서 여러 가지의 신앙의 상태와 비신앙의 상태를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물고기다. 짐승이다. 새다’ 라고 하는 것은 각 짐승마다의 특성이 있으니 ‘짐승의 그 면을 보니 네 눈에 보기가 좋으냐? 보기가 좋지 않은 것을 통해 너의 신앙의 성격과 성질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라’ 라고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