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종려주일설교-우리가 기억해야 할 3개의 십자가(눅23:32-43)

열려라 에바다 2024. 3. 25. 08:17
종려주일설교-우리가 기억해야 할 3개의 십자가(눅23:32-43)
 
권호만barnabak추천 3조회 63824.03.22 12:48댓글 9
 
 
우리가 기억해야 할 3개의 십자가
누가복음 19:28-40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을 보통 종려주일이라고 하는데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환영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흔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해서 종려나무가 핵심은 아닙니다.
종려주일의 핵심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들어가셨는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다는 것도 사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며 핵심적인 일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13:33)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예루살렘 입성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은 이 땅에 오신 최고의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 분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십자가는 너무나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십자가와 성경을 함께 전시하는 행사를 매년 여는데 온라인으로 그 행사를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만든 십자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종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나무에서부터 쇠붙이까지 재질도 다양했고요 모양이나 색깔도 다양했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려주는 의도로 이런 전시회를 마련한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3개의 십자가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십자가는 3개의 십자가입니다.


첫째는, 처형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이 강도들의 십자가는 처형 받는 십자가입니다.
32절에 보면,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행악자들 즉 악한 일을 행한 자로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 편에 있는 행악자 중 하나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한 것을 보면
이들은 십자가 처형을 받을 만한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중죄인을 처벌하는 처형도구였습니다.
이 십자가형이 얼마나 무서운지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 노예들,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은 이 십자가형을 면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행악자, 그리고 그들이 달린 십자가는 인간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운명임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인간은 죄로 인해 사망이라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 사망을 성경은 3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영적인 사망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면 그것이 육체의 사망이고 그 후에 지옥의 심판을 받는 것을 죄의 대가인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지옥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살아있는 육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그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입니다.
뜨거운 불의 심판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처형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악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은 이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강도가 당했던 십자가의 고통과 처형은 하나님 없는 우리 인간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형의 십자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모의한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를 끌고 빌라도에게 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의 재가가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심문한 로마 총독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기로 예수가 끌려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합니다.
때려서 놓겠다고 하고,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겠다고 합니다만 유대인들의 폭등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빌라도는 객관적인 입장입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할 때 예수는 십자가에 죽일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게 됩니다.
재수가 없어서입니까? 운이 없어서입니까? 사람을 잘못 만나서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2 17절에서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노예를 풀어주고 양민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장자를 치십니다.
죽음의 사자가 각 집을 다니면서 장자를 죽이는데 짐승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가서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 죽은 양이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피를 흘리고 죽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어린 양이 이스라엘 장자를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한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 5,6) 고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인간을 죄의 삯인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몸으로 죄의 값을 대신 치른 고귀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음에도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 밖에는 죄에서 구원받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행악자중에 하나는 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을 당할 정도로 험악한 행악자였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2-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세 번째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교회를 섬기며 주의 일을 하기 위한 괴로움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했던 자기의 십자가도 바로 사명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주님은 이 엄청난 구원의 길을 만민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졌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의 십자가를 졌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이 땅에 건너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대신 유월절 특사로 풀려난 바라바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졸지에 죽음에서 구원받은 행운의 주인공이 된 바라바는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구경하며 따라가게 됩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 행렬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볼 때 마다 저 십자가는 내가져야 할 십자가인데 나 대신에 예수가 지는구나.’
저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할 십자가인데 내 대신에 예수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바라바는 어디를 가든지 이 예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내가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에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데 나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나 대신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바라바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나대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여 죽어가는 많은 영혼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4.03.24.)